| 무기 유형 | 양손검 |
| 레어도 | ★★★★★ |
나는 모든 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다.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만은 들여다볼 수 있다.
지금 이 순간, 내 안에는 끝없는 공포뿐이다. 우리의 연구 기지, 저 끝이 보이지 않는 대균열에 맞서기 위해 마련한 '전망대'가 이렇게 침식에 잠겨버리다니, 절망스럽기 그지없다. 식양이 정말 효과가 있긴 한 걸까? 우리가 해 온 모든 일에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? 초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나도 미미한 존재다. 무릉도 삼켜질 것이고, 만물이 삼켜질 텐데, 우리가 어떻게 그 거대한 존재를 뒤흔들 수 있겠는가?
......
수로를 파야 한다. 지금은 사고 현장 피해자들에 대한 구조가 가장 중요하지만, 이 수로 역시 꼭 필요하다. 적어도 침투해 들어오는 침식 조류가 지하 수맥을 오염시키는 건 막아줄 테니까. 하지만 이 또한 아무 의미 없다. 그저 하루 일찍 죽느냐, 늦게 죽느냐의 차이일 뿐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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손이 온통 물집 투성이다. 공사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는 설비 작업장 직원이지만, 지금은 나도 공사에 투입되어야 한다... 본부의 지원이 올 때까지는 우리끼리 버텨야 하니까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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손을 베였다. 수로 공사장에서 부러진 단검 한 자루를 파냈다. 이곳에 묻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? 백 년? 내 손에 묻은 피를 봐라!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이성의 끈은 진작에 끊어졌다! 부모님도, 아내와 아이도 이제 없는데,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것들을 내가 믿을 것 같나. 난 왜 살아야 하지? 난 왜 살아야 해?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 거냐고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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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일, 죽어버리자.
......
심야의 공사 현장을 자살 장소로 골랐다. 참 좋은 장소에, 날씨마저 완벽하다. 장대비가 쏟아져 모든 게 진흙탕에 잠긴 것 같다. 우리 같은 패배자는 이렇게 진흙 속에서 죽어 마땅하다.
폭우가 아직 다 파지 못한 수로의 일부를 무너뜨렸다. 씻겨 내려간 흙 속에서, 희미한 금속 광택을 보았다.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. 양손으로 흙을 파헤쳐 그 아래 묻힌 것을 확인했다. 그건 녹슨 밸브였다.
그랬던 거구나.
자료도, 확인 절차도 없이 그저 급조한 공사였는데, 기가 막힌 우연으로 선인들이 미처 끝내지 못한 수로를 우리가 뚫어버린 것이다.
녹이 슬어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밸브가 그 순간 다른 형상으로 보였다. 그것은 내 아버지의 당부였고, 내 어머니의 초상이었으며, 혹은 내 조부모님 무덤 앞의 종이꽃이기도 했다.
그리고 마지막은 나, 더러운 빗물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.
그랬던 거구나.
언제나 살아가길 바라는 이가 있고, 언제나 살아남는 이가 있다.
세상은 무한하지 않으며, 공포 또한 결국에는 남김없이 잠식될 것이다.
그러니 나는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련다.
내가 이어나가는 것은 그저 생명이 존속하려는 본연의 모습일 뿐이니, 이렇듯 반복되며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.